우리 동네 길의 간판이 지난달에 일제히 바뀌었다. 회색 바탕에 흰 글씨, 같은 서체, 같은 높이, 테두리 두께까지 같다. 멀리서 보면 가지런하다. 가까이 가서야 문제를 알았다. 구두 수선집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못 찾았다.
그 집은 원래 나무판 하나를 걸어 두었다. 붉은 페인트로 ‘천 씨 구두 수선’이라 썼는데 절반이 벗겨져 ‘구두’라는 글자는 윤곽만 남았고, 옆에 마커로 작은 글씨를 덧썼다. 지퍼 교체, 열쇠 복사. 판은 비뚤어져 있고 못은 녹이 슬어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은 통일된 양식의 ‘편의 서비스 거점’ 간판이 걸려 있다. 가게가 아직 있다는 건 안다. 다만 문패를 하나씩 세어야 찾아갈 수 있다.
간판은 본래 무엇을 하는 물건인가. 장식이 아니라 말이다. 길을 향해 자기가 누구인지 외쳐야 한다. 무엇을 파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지. 글씨가 조금 비뚤고 페인트가 조금 벗겨지고 작은 글씨가 한 줄 삐뚤빼뚤 덧붙은 것 — 디자이너 눈에는 모두 결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결함이 말해 준다. 이 간판은 주인이 직접 만든 것이고, 이 가게에는 주인이 있다고.
간판을 통일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안전이다. 낡은 간판의 철제 틀이 녹이 슬어 뚫리면 태풍 날 떨어져 정말 사람이 죽는다. 겁주는 말이 아니다. 둘째는 거리 풍경이다. 한 길에 수십 개의 간판이 서로 겹치고 색이 부딪히고 물건보다 간판이 커서 확실히 어지럽다. 행정이 마주한 것은 이 두 가지이지 미학이 아니다. 그래서 통일 간판을 한꺼번에 ‘미학적 횡포’라고 욕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쓸모도 없다.
내 생각은 이렇다. 규제할 곳을 잘못 짚었다. 간판에 정말 필요한 규제는 구조와 소방이다. 철골이 튼튼한지, 전기 배선에 문제는 없는지, 비상 탈출창을 가리지는 않는지. 이것은 단단한 기준이고 하나도 양보할 수 없다. 서체, 색, 크기, 손글씨인지 인쇄인지 — 이것은 무른 부분이고 주인의 몫이다. 단단한 것을 엄격히 다스리고 무른 것을 풀어 주면 거리는 안전과 생기를 함께 얻는다. 반대로 무른 것을 조이고 단단한 것을 느슨하게 하면 지금 같은 모습이 된다. 가지런하고 깨끗하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겹 더 들어가 보자. 손글씨는 왜 정겹게 느껴지는가. 흔적이기 때문이다. 인쇄된 서체에는 저자가 없고 손글씨에는 있다. 간판의 글씨를 주인이 직접 썼는지 남에게 부탁했는지 보는 사람이 설명할 수는 없어도 눈은 구별한다. 사람은 흔적에 민감하다. 책상 위의 흠집, 책 여백의 메모, 옷의 깁는 자국 — 모두 ‘누군가 썼다’고 말한다. 도시가 깨끗해질수록 흔적은 줄고, 우리는 어느새 ‘새것’을 ‘좋은 것’의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
네온이 도로 위로 튀어나와 겹겹이 행인 머리 위에 드리워지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그 활기에는 대가가 있었고, 떨어져 사람을 맞히는 일은 실제로 있다. 향수로 남의 목숨을 걸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간판을 다시 사람이 하는 말로 되돌리는 것. 서식의 빈칸을 채우는 글자가 아니라.
지난 주말에야 천 씨를 찾았다. 골목 어귀로 옮겼는데 간판은 여전히 그 나무판이고 페인트가 또 한 군데 벗겨져 있었다. 새 간판은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두 달 걸어 봤더니 글씨가 너무 작아 손님이 문을 못 찾아서 자기가 다시 내걸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때 조금 쑥스러워했다.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나는 오히려 말을 듣지 않는 간판 하나쯤 남아 있는 길이라야 살아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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