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어, 칠팔 년 단골이 물건 세 상자를 들고 가면서 가방을 다 뒤지더니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며 내일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 하며 나는 공책을 꺼내 적었다. 이름, 날짜, 금액.
공책에 적힌 외상은 많지 않다. 일 년에 수십 건이고, 대부분 다음 날 줄을 그어 지운다. 공책을 두는 건 못 받을까 봐가 아니다. 이 장사에서 외상은 원래 장사의 일부다. 아침에 물건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현금이 모자란 경우가 많아, 물건을 먼저 가져가고 저녁에 정산한다. 외상을 안 해 주면 그 사람은 내일 다른 집으로 간다.
그런데 차츰 알게 된 것은, 외상의 골치 아픈 부분이 돈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상을 해 줄지, 얼마까지 해 줄지는 나는 친분으로 정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본다. 이 몇 해 동안 금액을 한 번이라도 잘못 말한 적이 있는지, 결제를 한 번이라도 미룬 적이 있는지. 숫자가 맞고 날짜를 지키는 사람은 한도가 자연히 올라간다. 차갑게 들리지만 사실 가장 공평하다. 말솜씨가 좋은지도,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아는 사이인지도 보지 않는다.
가장 흔한 골칫거리는 떼먹는 게 아니라, 외상을 시험으로 쓰는 경우다.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라거나 “우리 몇 년인데"로 시작한다. 그 한마디에 장사상의 거래가 도덕적 표명으로 바뀐다. 외상을 안 해 주면 너는 나를 얕보는 거라는 뜻이 된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이 돈은 받기 어렵겠구나 싶다. 반드시 안 갚아서가 아니라, 이 빚은 이제 꺼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꺼내면 “그걸 아직도 기억해?“가 된다. 돈은 아직 얼마 안 빌려줬는데 정이 먼저 담보로 잡혀 있다.
담보로 잡힌 정은 되찾지 못할 때 가장 초라하다. 돈은 포기해도 체면은 못 버리니, 많은 사람이 차라리 말하지 않고 종이 위에서 썩게 둔다. 썩는 건 돈이 아니다. 다음에 손을 내밀려 했던 그 여유다.
반대로 나를 민망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아주머니는 늘 약속보다 일찍 갚았다. 금요일이라고 했는데 목요일 오후에 돈을 가져오고, 덤으로 직접 담근 무절임 두 근을 놓고 갔다. 그렇게 시간을 잘 지키니 장부에 적기가 민망하다고 농담했더니, 적어, 네가 적어야 내가 안심이 돼,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녀가 원한 건 내 믿음이 아니라, 이 빚에 분명한 테두리가 있는 것이었다. 믿음은 흐릿하고 테두리는 실재한다. 마음에 테두리가 없는 사람일수록 “나 믿어?“를 자꾸 확인하려 든다.
그래서 요즘은 외상을 할 때 미리 말한다. 얼마까지, 며칠 안에, 그리고 종이에 적는다. 말을 막아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빠져나갈 길을 남기는 것이다. 싫은 소리를 먼저 해 두면, 기한이 되었을 때 “그 외상” 한마디면 둘 다 얼굴 붉힐 일이 없다. 적지 않으면 내 독촉은 의심처럼 들리고 상대의 지연은 배신처럼 들려서, 몇십 위안짜리 외상이 원망 한 겹을 쌓는다. 작은 장사를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장부를 맞추는 건 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정이 물러설 곳을 남기는 일이다. 정은 계산을 견디지 못하지만, 분명한 말은 견딘다.
못 받은 돈도 있다. 재작년에 외지로 다니는 남자가 육백 위안 남짓을 빌린 뒤 전화로 늘 다음 주, 다음 주 했다. 나중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 줄은 연필로 동그라미를 친 채 공책에 남아 있다. 동그라미가 감싼 것은 육백 위안이 아니라, 내가 사람을 한 번 잘못 본 일이다. 돈은 놓아도 된다. 교훈은 남겨 둔다.
공책에는 또 다른 쓸모가 있다. 글씨는 내가 쓴 것이라 바쁠 때는 흘려 쓰고 한가할 때는 가지런하다. 넘겨 보면 그날 얼마나 정신없었는지가 보인다. 휴대폰 표는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볼 것이 없다. 사람 사이의 왕래도 한 권의 출납장이라, 글씨가 흐트러진 페이지가 오히려 가장 또렷이 기억난다.
오후에 그 단골이 와서 돈을 놓고는, 어제 돌아가는 길에도 이 일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나는 그 줄을 지웠다. 아주 가볍게. 이 공책의 모든 줄은 머지않아 지워질 것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지우지 못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새로 적기가 두려워지는 일이다.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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