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서 주문서를 쓴다. "화장지 두 묶음", "이스트 세 상자", "베이킹파우더 다섯 봉지" — 펜끝에 닿는 것은 셀 수 있는 단위뿐이다. 절반쯤 쓰다가 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분은 "돗자리 한 장"이라고 하지 않고 "돗자리 한 폭"이라고 했다.
어릴 적에는 그 말이 이상했다. 돗자리는 옷이 아닌데. 나중에야 알았다. ‘폭’은 본래 옷감의 너비를 세는 말이고, 한 폭의 돗자리란 사람을 감쌀 만한 크기로, 옷깃처럼 몸에 딱 맞게 덮이는 그 한 장이라는 뜻이었다. 할머니가 사물을 재는 방식은 내 방식과 달랐다. 나는 개수를 세고, 그분은 모양을 쟀다.
한자의 수량사에는 그런 것이 남아 있다. 소는 한 마리, 말은 한 필, 물고기는 한 마리. 소를 ‘마리’로 세는 것은 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몸집이기 때문이고, 말을 ‘필(匹)‘로 세는 것은 안장과 짝을 이뤄 한 벌이 되어야 비로소 한 필이 되기 때문이다. 배는 한 척, 집은 한 채, 연필은 한 자루, 배추는 한 포기, 나무는 한 그루. 이런 말들 뒤에는 매번 한 번의 구체적인 ‘봄’이 서 있다. 어떻게 자라는가, 어떻게 놓는가, 어떻게 쓰는가, 어디가 망가지는가.
이것은 중국어의 번거로움이니 간소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개’로 충분하다, 소 한 개, 말 한 개, 물고기 한 개, 아무도 헷갈리지 않는다. 편한 쪽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도 일상에서 “그거 하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러나 수량사를 문법의 장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명사에 꿰매 붙인 레이스가 아니다. 분류다. 분류 뒤에는 경험이 있다. 세계를 잘라 나누던 방식이 한 칸씩 놓여 있다. “한 폭의 돗자리"에는 허리를 굽혀 돗자리를 펴는 동작이, “한 대의 향"에는 향 한 대가 타는 시간의 길이가 들어 있다.
‘개’라고 해서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를 더 하는 것뿐이다. “돗자리 하나"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스스로 채워야 한다. 얼마나 큰지, 펴는 것인지 거는 것인지. 수량사가 아껴 준 그 한 마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애가로 만들 생각은 없다. 수량사는 죽지 않았다. 새것이 자라고 있다. “거래 한 건”, “디자인 한 판”, “드라마 한 회”, “영상 한 편”, “장세 한 파”, “세대 한 갈래” — 이런 새 수량사가 세는 것은 사물의 모양이 아니라 흐름 속의 한 지점, 화면 속의 한 파일, 한 시기의 한 세대다. 언어가 보는 대상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어떤 모양인가"에서 “이것이 시스템의 어디에 있는가"로. 옛 수량사는 손에 잡히는 것을 쟀고, 새 수량사는 관계를 잰다.
영어에도 같은 장치가 있다. a head of cattle, a bar of soap, a sheet of paper, a grain of rice. grain은 본래 낟알이라는 뜻으로, 쌀 한 알도 모래 한 알도 grain이고, bar는 막대라는 뜻으로 비누 한 개도 초콜릿 한 개도 bar다. 중국어만의 특허가 아니다. 물건을 쪼개어 쓰는 사람은 누구든 먼저 그 모양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둘 다 진짜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 둘 만하다. 손에 ‘개’, ‘편’, ‘파’만 남으면 사물을 보는 방식도 같이 거칠어진다. 어떤 모양인지, 어떻게 쓰는지, 얼마나 가는지 묻지 않고, 몇 개인지, 몇 번째인지만 묻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공책에 물건을 적을 때는 ‘묶음’, ‘상자’, ‘봉지’라고 쓰려 한다. ‘개’라고 쓰지 않는다. 품위 때문이 아니다. 수량사 하나를 제대로 쓰려면 그 물건을 한 번 똑바로 봐야 한다. 그 한 번의 시선은, 원래라면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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