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밥자리에서 한 연장자가 어떤 업종이 「삼 년 안에 반드시 망한다」고 단언했다. 사 년이 지났고, 그 업종은 아직 있고,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오래전에 잊었다.
큰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장부였다.
가득 채운 말은 수상할 만큼 값이 싸다. 「내 생각에는」 「아마」 「지금 보기로는」을 한 마디 덧붙이려면 힘이 조금 더 들고, 「근거는요」라는 되물음도 각오해야 한다. 「절대」 「반드시」 「백 퍼센트」로 바꾸면 간편하고 기세도 산다. 이때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체면을 세워 준다. 체면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나는 그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세계를 아는 일과 별개인데, 둘을 섞으면 곤란해진다.
더 곤란한 것은 우리의 기억력이다. 사람은 자기 말이 맞았던 몇 번을 기억하고, 틀렸던 것들은 물에 씻긴 듯 흔적마저 옅어진다. 「나는 원래 눈이 정확하다」 같은 자기 평가는 거의 누구에게나 있고, 거의 믿을 수 없다. 그가 정말로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판단력이라는 것은 자기 느낌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장부로 잰다. 장부가 없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만해진다. 자기 실수가 모두 자기 손으로 사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가득 채우는 것이 모두 병은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갈라야 한다. 한 부류는 결론이 단단하고 증거도 단단하다. 「이 일은 안 된다」고 말할 때 정말로 데이터를 세 번 보고 전문가 다섯 명에게 물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은 실력이고 배워야 한다. 다른 부류는 결론은 단단한데 증거가 무르다. 목소리와 자리로 밀어붙이는 것은 자세이고, 경계해야 한다. 말투의 강약은 결코 분수령이 아니다. 진짜 분수령은 이것이다. 뒤집힐 수 있는 조건을 내놓을 용기가 있는가. 「석 달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틀린 것」이라고 적어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득 채워도 무방하다. 자기를 검증대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널리 말해지지 않는 결과가 있다. 가득 채우는 사람은 흔히 남까지 함께 묶는다. 「이건 확실히 문제없어」 한마디면 옆에 있던 사람은 의심을 꺼내기 어려워진다. 꺼내면 면박을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밥자리에서 회의실에서, 참혹한 결정은 대개 이렇게 통과된다. 위험을 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분위기 속에서 흥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가 없어서다. 말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 작정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확신을 미리 지불했다. 그 청구서는 끝내 누군가가 받아야 한다.
반대로 가장 교활한 쪽은 끝까지 가득 채우지 않고 곳곳에 퇴로를 남기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은 고무 같아서 어떻게 주물러도 맞고, 듣기에는 편안하며,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 그럴 만하지」 「뭐라 하기 어렵네」를 열 번 들어도 당신은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여전히 모른다. 그것은 신중이 아니라 판을 걸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판단력은 바로 판을 걸어야 자란다. 걸어 보고, 틀리고, 인정해야 비로소 자기 편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손에 잡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어리석은 방법을 하나 정했다. 사실을 말할 때는 사실만 말하고, 확실하지 않은 곳은 확실하지 않다고 밝힌다. 판단을 내릴 때는 나를 뒤집을 조건을 함께 적는다. 차라리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한마디를 남길지언정, 「상황에 따라」라는 모호한 한마디를 남기지 않는다. 전자는 검증할 수 있고, 후자는 바닥이 없다.
그 연장자와 나는 그 뒤로도 계속 사이가 좋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다만 내 수첩에 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어느 해 어느 달에 무슨 말을 했고,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수첩은 보기 흉하다. 절반이 줄 그어 지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 주지 않는 독자이고, 밥자리에서 모두가 끄덕여 준 것보다 값이 있다.
복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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