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휴대폰을 넘기다가 셔플로 20년도 더 된 옛 노래가 나왔다. 나는 멈춰 서서 끝까지 듣고, 되감아 한 번 더 들었다. 그날 밤 새 노래 세 곡은 모두 30초 안에 넘겨버렸다.
이 대비에서 “요즘 노래는 안 된다"는 게으른 결론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비교 자체가 공평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옛 노래"라고 말할 때 실제로 가리키는 건 시간이 걸러 둔 소수다. 20년 전에도 조악하게 만든 노래는 널렸다. 다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라디오가 틀지 않고, 알고리즘이 밀지 않아 조용히 죽었다. 살아남은 건 폐허 전체에서 파낸 생존자다. 오늘 나오는 신곡 전부를 그 생존자와 비교하는 건, 신입생의 숙제 전부를 한 작가의 선집과 견주는 것과 같다. 지는 쪽은 당연히 전자다. 통계학에서는 이를 생존자 편향이라 부르고, 음악계에서는 해마다 작동한다.
이걸 납득한 뒤로 옛 노래를 들을 때 마음가짐이 정직해졌다. “과거가 더 좋았다"가 아니라, “과거가 더 가차 없이 걸렀다"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을 끝내는 것도 일종의 게으름이다. 편향이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진지하게 비교해 보니, 옛 노래에는 확실히 지금의 조립 라인에 드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멜로디가 가사보다 앞서 달린다는 점이다. 뤄다유는 “흐르는 물은 세월의 이야기를 가져간다”(<세월의 이야기>)라고 썼다. 가사 전체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 멜로디는 두 번이면 흥얼거린다. 멜로디는 노래의 뼈다귀다. 뼈가 서야 가사를 걸 곳이 생긴다. 요즘 노래는 흔히 거꾸로다. 먼저 훅이 있고, 감정이 있고, 15초짜리 숏폼으로 자를 수 있는 구간이 있다. 멜로디는 그런 요구를 둘러싸고 조립된다. 첫 인상은 요란한데 기억에 남지 않는다.
둘은 여백을 둘 용기다. 옛 노래의 편곡에는 악기만 연주되는 긴 간주가 있고, 숨 쉴 틈이 있으며, 감정은 한 층씩 쌓아 올린다. 지금의 제작은 청취자가 넘길까 봐 1초부터 채워 넣고, 후렴을 7초대로 당기고 싶어 한다. 가득 찬 것과 진한 것은 같다. 한 끼에 열두 반찬이 세 반찬보다 길게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내 결론은 타협적이다. 오래된 노래가 질리지 않는 건, 절반은 귀의 치우침, 절반은 시간의 가차 없는 걸러짐이다. 앞 절반을 인정하면 향수를 안목으로 착각하지 않고, 뒤 절반을 인정하면 새로운 것을 한 방에 때려눕힐 필요도 없다. 아직 체를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내 듣는 습관도 바꿨다. 하나는 옛 앨범의 깊은 곳까지 파는 것. 타이틀곡만이 아니라 생존자 속에는 묻힌 두 번째 곡도 있다. 또 하나는 새 노래에 30초의 인내를 더하는 것. “첫 귀"에게서 심판권을 조금 되찾아 오는 것이다. 시간은 최고의 음악 평론가지만 채점이 극히 느리다. 점수가 나오기 전에 우리는 적어도 자기 편향을 똑바로 볼 수는 있다.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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