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맡에 읽다 만 책이 다섯 권 쌓여 있고, 책갈피는 각각 다른 페이지에 멈춰 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읽은 책은 이미 세 달 전이다. 독서 인증 기준으로 따지면 이번 분기는 사실상 낙제다.
그런데 문득 깨달은 게 있다. 원래 독서라는 건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공사 일정처럼 만들어 버린 건 우리 자신이다.
언젠가부터 독서는 성과주의 병에 걸렸다. 연간 책 목록, 독서 인증, ‘일 년에 백 권’ 플래그. ‘완독’이 경직된 지표가 되고, 읽다 만 책은 빚처럼 느껴진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전혀 손에 안 잡히는 책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읽고, 덮는 날에는 한숨을 돌렸지만, 한 달 뒤에 기억나는 건 ‘힘들었다’는 세 글자뿐이었다. 억지로 끝까지 읽은 책은 읽지 않은 책과 같다. 시간만 잡아먹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서에 대한 작은 반감만 남는다.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 극단도 옳지 않다. 기분 내키는 대로 두세 장 넘기고 버리는 것도 생각이 짧다. 내려놓을 거면 제대로 내려놓아야 한다. 내 방법은 먼저 누구의 문제인지 가리는 것이다.
책의 문제인 경우가 있다. 기계 번역처럼 뻣뻣한 번역, 삼 분의 일은 물 탄 분량, 핵심 주장은 서문에서 이미 다 말했고 본문은 반복뿐. 이런 책을 내려놓는 데는 비용이 없다. 죄책감도 필요 없다. 주문과 다른 음식이 나오면 주방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의 문제, 정확히는 ‘지금의’ 나의 문제인 경우가 있다. 문턱이 높아 온전한 시간과 맑은 정신이 필요하거나, 조금의 세상 경험이 있어야 받아들여지는 책이다. 이런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라 유예다. 도연명은 “好讀書,不求甚解”(『오류선생전』)이라 했다. 흔히 달관한 태도로 읽히지만, 나는 오히려 위로로 읽고 싶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계속 읽어도 되고, 잠시 멈춰도 된다. 나이를 기다려야 하는 책도 있다. 스무 살에 손대지 못했던 『사기』가 마흔 살엔 흥미진진할 수 있다. 그 이십 년은 낭비가 아니었다. 그 책을 읽을 밑천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단, 전제가 있다. 유예는 무기한이 아니다. 미룬 책에는 ‘다시 도전할 지점’을 메모해 둔다. 입문서 한 권을 다 읽은 다음에, 이 바쁜 시기가 지나면 다시 집어 보는 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를 기다린다’가 가장 그럴듯한 변명이 되고, 침대맡은 점점 높아만 가며 책마다 빚이 되어, 독서는 또 하나의 재고가 된다.
실제로 나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컨디션이 좋을 땐 어려운 책을, 잠들기 전엔 가벼운 책을. 삼십 페이지를 읽고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려놓고, 면지에 내려놓은 이유와 날짜를 한 줄 적어 둔다. 그 한 줄이 중요하다. 몇 년 뒤 다시 집었을 때, 책이 잘못됐는지 내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다. ‘읽고 싶은 책장’은 소망 목록이지 빚 목록이 아니다.
끝까지 읽는 건 수단이고, 견문을 넓히는 게 목적이다. 책은 재고 정리를 하려고 있는 게 아니다. 일 년에 서너 권을 깊이 읽는 편이 서른 권을 흐릿하게 훑는 것보다 낫다. 끝까지 읽지 못하는 책은 내려놓아도 좋다. 다만 내려놓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내려놓는지는 알고 나서 하자.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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