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친구와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 3배속으로 하루 만에 정주행했다는 말을 들었다.디테일을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통쾌했다"는 말뿐이었다. 웃어 주고 나서 내 시청 기록을 열어 보니, 절반 이상에도 배속이 들어가 있었다.
배속 시청은 남에게 말하기 창피한 버릇에서 기본값이 되었다. 지하철에서도, 낮잠 자기 전에도 모두 빨리 감기를 한다. 어른들은 “이 세대는 드라마조차 끝까지 못 보는구나” 하고 혀를 찬다. 흔한 설명은 참을성이 죽었고, 시간이 조각조각 나뉘었고, 숏폼이 사람을 길들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설명의 절반만 인정한다.
나머지 절반은 내 판단이다. 배속은 절반이 권리 되찾기다. 드라마의 속도는 명목상 감독이 정하지만, 실제로는 분량 부풀리기가 정하는 경우가 많다. 회상 장면, 슬로모션, 빙빙 도는 대사. 마흔 부작 중 진짜 내용이 있는 것은 스무 부작뿐일지 모른다. 시청자가 배속 버튼을 누르는 건 스스로 편집을 하는 셈이다. 물기를 짜내고 알맹이만 남긴다. 루쉰은 《문외담(門外文談)》에서 “이유 없이 남의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은 재물을 빼앗고 목숨을 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썼다. 억지로 늘린 드라마에 딱 맞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배속은 무례가 아니라 항의다. 편집권을 제작진에게서 조금 되찾아오는 일. 작품은 그들의 것이고 시간은 내 것이다. 이 계산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은 절반은 인정하기 싫다. 아낀 시간은 독서나 산책으로 가지 않고, 대개 다음 배속 드라마로 사라진다. 빨리 감기를 하는 건 정당한 일에 시간을 쓰려는 게 아니라 한가로움을 견디지 못해서다. 느려지면 심심해지고, 심심한 자리에서만 생각이 마음껏 뛰놀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려운 건 드라마가 긴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빈 곳이다.
더 중요한 층이 하나 더 있다. 모든 것이 빨리 감기에 견디는 건 아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속도 자체가 내용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 카메라를 한참 멈춰 둔다. 그 멈춤 안에 담긴 것이 바로 삶이다. 음악은 더 분명하다. 멜로디의 느리고 빠름이 작품의 일부인데, 배속으로 듣면 음표는 남아도 숨결이 사라진다. 배속 시청은 비스킷을 씹는 것과 같다. 칼로리는 채워지지만 맛은 없다. 미술관을 뛰어다니며 보는 것과 같아서, 그림마다 “봤다"지만 한 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줄거리는 배속으로 끝낼 수 있지만, 정취는 그럴 수 없다.
내 방법은 분리다. 밥 반찬용 드라마, 억지로 늘린 드라마는 마음껏 배속으로, 1.5배속도 아깝지 않다. 진짜 좋은 작품은 정직하게 1배속, 약속에 나가듯이. 기준은 하나다. 내 시간의 감각을 맡겨도 될 만한가. 빠르고 느린 것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장부의 문제다. 좋은 것은 아껴 쓰고, 나쁜 것은 빨리 써 버리는 것.
결국 패스트푸ード는 서서 먹어도 되지만, 좋은 음식에는 앉아야 한다. 화면 속의 것들은 무수히 많지만, 천천히 볼 가치가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많지 않기에 만났을 때는 빨리 감기를 하지 말자.
卜世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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