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가서, 그다지 익숙지 않은 동네에서 사십 분을 헤맸다. 돌이켜 보면 이 일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나는 길을 못 걷는 사람이 아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집을 나서면 먼저 지도를 보고, 몇 개의 지형지물을 외우고, 「동쪽으로 두 블록 더 간 다음 북쪽으로」를 소리 없이 되뇌었다. 목적지에 닿아서도 해의 방향과 문패 번호로 스스로를 교정해야 했다. 그때의 길 찾기는 한 벌의 동작이었다. 보고, 외우고, 걷고, 틀리고, 고치는 것. 지금 그 한 벌의 동작은 「이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되었다. 줄어든 것은 물론 시간만이 아니라, 그 대여섯 단계 자체다.
능력이란 대체 어디에 자라는가, 나는 자주 생각한다. 결과 안에 자라지 않고 과정 안에 자란다. 암산은 틀리고 또 다시 계산하는 초조함 속에서, 문장의 분별은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는 망설임 속에서, 판단력은 남의 실수 표본을 충분히 눈으로 본 뒤에 자란다. 도구는 그 중간의 몇 단계를 통째로 걷어 가고 결과만 앞에 내밀어 준다. 아주 깔끔하고, 아주 비어 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게 효율인데 무슨 불평이냐고. 인정한다. 편리는 참으로 편리하다. 나는 「자기를 단련한다」는 이유로 내비게이션을 끄지는 않는다. 그런 주장은 거의 자기 학대에 가깝다. 내가 반대해 온 것은 언제나 도구가 아니라, 물러설 길까지 함께 넘겨주는 일이다. 쓰느냐 마느냐는 선택이고, 할 줄 아느냐는 배짱이다. 이 둘이 뒤섞였기 때문에 저렇게 많은, 당당하고 어리석은 일들이 생겼다.
더 경계할 것은 그 다음 층위의 결과다. 과정을 생략하면 사람은 결과를 심사하는 능력도 잃는다. 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계산서가 틀린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길을 외워 본 사람은 내비게이션이 지금 한 바퀴 돌아가는 중임을 안다. 책을 몇 권 읽은 사람은 두 장만 넘겨도 이 글이 통하는지 안다. 반대로 과정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결과물 앞에서 두 가지 태도밖에 갖지 못한다. 전면 수용, 아니면 전면 의심. 그 중간의 커다란 영역, 본래 경험이 채워야 할 자리는 비어 있다.
이 몇 해 사이 그 문제는 더 날카로워졌다. 기계는 쓰고, 계산하고, 번역한다.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보다 매끄럽게 해낸다. 그래서 「나는 몰라도 된다」가 아주 자연스러운 한 문장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본 정경은 대개 반대다. 도구를 잘 쓰는 사람일수록 먼저 자기 발로 한 번 걸어 보고 도구에게 나머지를 맡긴다.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한 문장으로 완성품을 받아 내기를 바라고, 그 완성품 앞에서 흠을 짚지도 못하고 어디가 좋은지도 말하지 못한다. 앞의 효율은 복리고, 뒤의 효율은 일회용이다.
다른 극단으로 갈 필요도 없다. 어떤 단계는 정말로 넘겨주어야 마땅하다. 손으로 장부 쓰기, 전화번호 외우기, 버스 노선 외우기 같은 것들은 생략되어도 아깝지 않다. 그에 대응하는 능력은 이미 놓일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단계가 근육이고 어느 단계가 의례인지를 가려야 한다. 판단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생략한 뒤에도 판단력이 남아 있는가. 받아들이기만 남는다면, 그것은 지반을 임차 계약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옹졸한 규칙을 하나 정했다. 걸을 만한 길은 걷고, 머리로 셀 만한 셈은 먼저 머리로 세고, 문제가 생기면 삼 분은 스스로 생각한 뒤에 검색한다. 고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수를 남겨 두려는 것이다. 남겨 둔 한 수는 순조로울 때는 값어치가 보이지 않고, 도구가 고장 나는 날에야 무게를 드러낸다. 그리고 도구는 언제나 고장 난다. 그것이 도구의 유일하게 믿을 만한 성품이다.
그날 내가 거리에서 더 걸은 사십 분은, 결국 지난 십 년치 수업료를 뒤늦게 낸 것이고, 그것도 아주 조금만 낸 것이다.
복세 씀

说些什么吧!